발해

요약

  •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 이칭: 진국(振國), 진국(震國)

  • 분야: 고대사

  • 유형: 지명

  • 시대: 고대-남북국-발해성격국가, 고대국가소재지한반도 북부∼중국 만주·연해주

정의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건국과 성쇠

요약: 발해의 왕계

① 고왕대조영(698∼719) - ② 무왕대무예(719∼737) - ③ 문왕대흠무(737∼793.3) - ④ □왕대원의(793.3∼793?) - ⑤ 성왕대화여(793?∼794) - ⑥ 강왕대승린(794∼809) - ⑦ 정왕대원유(809∼812) - ⑧ 희왕대언의(812∼817?) - ⑨ 간왕대명충(817?∼818) - ⑩ 선왕대인수(818∼830) - ⑪ □왕대이진(831∼857) - ⑫ □왕대건황(858∼871) - ⑬ □왕대현석(872∼894?) - ⑭ □왕대위해(895?∼906?)-⑮□왕대인선(907?∼926.1)

  • ?은 즉위년, 퇴위년이 확실하지 않음

  • 10대 왕까지는 즉위년칭원법, 11대 왕부터는 유년칭원법에 따름

건국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되었다. 건국의 기폭제가 된 것은 696년에 요서(遼東) 지방의 영주(營州)주 01)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 이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奚族), 말갈족 등이 있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에 겨우 평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에 동조했고,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에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이 때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동참했다.

두 집단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으로 건너왔으니, 이들이 영주에서 말갈족의 거주지인 북방으로 손쉽게 탈출하지 않고 아직 당나라 세력이 남아 있는 동쪽의 고구려 옛 땅으로 돌아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암시하고, 발해 건국이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함에 따라 당나라 군대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이해고(李楷固)로서 거란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에 항복한 인물이다. 그는 먼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고, 이 무렵에 걸걸중상도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대조영이 두 집단을 통합하였고, 당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랴오둥을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해고는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경계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오자, 대조영 집단은 부득이 당나라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행히 이 전투에서 이해고가 대패하여 귀환했다.

대조영은 무리를 수습하여 영주로부터 2천리나 떨어진 동모산(東牟山) 에 나라를 세웠다. 발해가 건국된 해는 일본측 기록인『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전해진다. 건국지는 지린성 돈화(敦化)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말갈족의 터전이기에 기록에는 ‘읍루의 옛 땅’에 도읍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조영이 처음부터 건국지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추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었다. 산 위에 성을 쌓아 건국한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서, 건국 당시 방어에 급급했던 절박한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건국 집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영주를 탈출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립적으로 망명자를 통솔했으니,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지휘했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했다. 이때의 규모는 1천 명 가량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점차 흡수함에 따라 세력이 날로 불어나 마침내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주도권은 고구려 유민이 쥐고 있었을 것이니, 현전하는 발해인의 성씨 가운데 고(高)씨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발해 왕실과 귀족이 묻힌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서 제일 상층부에 속하는 무덤들에 고구려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실 등에서 증명된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국(振國)’ 이라 했다. 진국(震國)이란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걸걸중상에게 봉해진 진국공에서 유래해서 추후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이 713년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 로 바꾸었다.『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서 이때에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고 한 것은 당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비하해 불렀기 때문이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이는 발해국의 귀속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순수한 고구려인도 순수한 말갈인도 아니었으니, 역사 기록에 고구려 별종(別種)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조영 집안은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 장수를 역임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에는 그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기에는 이미 고구려 유력가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건국 시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통솔할 수 있었다.

건국을 선포한 뒤에 고왕(高王)대조영(?∼719)이 추진한 것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동돌궐(東突厥)에 사신을 파견했고, 역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등 대아찬을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당나라도 발해에 화해의 몸짓을 보내왔다. 707년경에 당중종은 장행급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무했고,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했다. 마침내 713년에 당현종이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함으로써, 비로소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는 거의 매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전

발해의 발전은 2대 무왕(武王, 719∼737)과 3대 문왕(文王, 737∼793) 때에 이루어졌다. 무왕대무예 는 즉위 후에 인안(仁安) 이란 연호를 선포하였으니,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은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왕의 통치기에 동모산에서 현주(顯州, 현재의 지린성 和龍)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복군주라는 사실이다. 그가 즉위한 뒤에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발해 영토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상당수 회복했음을 선언했다. 또 북쪽과 동쪽의 말갈 땅도 복속시켰으며, 남쪽의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도 진출하여 신라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마찰을 야기했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대결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은 발해 세력이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데에 불안을 느끼자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당나라는 이를 호기로 삼아서 726년에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했다. 무왕은 이런 조치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앞뒤에서 협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727년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고립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거란, 일본과 연합 하고, 당나라는 신라, 흑수말갈과 연합 하는 동아시아 세력 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任雅)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동생은 당나라에 숙위했던 경험이 있어 당나라에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 수차례 간언하다가 결국 무왕의 분노를 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고, 그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던 차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거란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격퇴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종식된 뒤인 735년에 신라는 그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발해도 735년에 당나라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가 복원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 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57년간이나 재위한 그는 시호에서 보듯이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흥(大興) 이란 연호를 택했다가 774년에는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가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된 듯하다. 또 즉위한 직후에 당나라로부터 국가 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국가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건국 초기에 고구려 제도를 많이 따랐던 모습이 사라지고, 당나라 제도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중앙행정기구와 중앙군대, 관리의 등급제도와 복장제도를 마련했다. 지방 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체계가 갖추어졌다. 전국에 5경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 을 둔 것은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수도를 중앙이 아닌 북쪽에 둔 것이나 네 번 수도를 옮긴 것에서는 독자적인 면이 엿보인다.

문왕은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황제국을 지향했다. 그의 존호에 금륜(金輪)이란 단어가 보이는 것은 전자의 증거이고, 황상(皇上),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 용어 등이 사용된 것은 후자의 증거이다. 국력 신장에 따라 당나라는 762년에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하여 책봉했다. 명목적인 것이지만, 이때에 비로소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관계(舅甥關係, 장인과 사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샀다.

그의 시대에는 천도 가 잦았다.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년 초에 현주(顯州, 중경) 에서 상경 (上京, 현재의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천도했고, 780년대 후반에 동경 (東京, 현재의 중국 지린성 琿春)으로 천도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에 상경 으로 되돌아왔다.

내분

문왕이 장기간 통치를 한 뒤에 사망하자, 발해는 그 후유증을 앓았다. 동궁이 먼저 사망하여 친척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6명의 왕이 25년 사이에 교체되었으니, 이것은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5대 성왕(成王) 은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 하고 그의 연호처럼 중흥(中興) 을 꾀했지만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대 강왕(康王) 때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798년 발해 국서에서는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고씨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언명했다.

융성

818년 10대 선왕(宣王, 818∼830) 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의 시대에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했다. 연호를 건흥(建興) 으로 삼은 선왕은 고왕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그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넓혔으니,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해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또 남쪽으로 요동지방과 대동강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처음에 ‘사방 2천리’였던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사방의 경계가 확정되었고, 5경, 15부, 62주가 완비 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일본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여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였으며, 교류 성격도 더욱 더 상업적으로 변모했다. 이 무렵에 일본이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11대 왕 대이진(大彛震, 831∼857)이 즉위한 뒤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왕권이 재차 강화되면서 융성기를 맞이했고,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 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융성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가 전하지 않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또 9세기 후반 이후 발해 국왕의 계승 관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872년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 유학생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고,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져, 신라를 능가했던 발해의 국력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멸망과 부흥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했다. 거란은 남쪽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서방 세력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서 동방의 발해를 공격해왔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926년 정월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의 내분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이나, 지방의 수령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분해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 시킨 후 수도에 동쪽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에는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도 함께 이주시켰다. 이로부터 발해 유민은 금나라 초기까지 200여년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자취를 남기다가 서서히 중국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부는 요나라 또는 금나라 지배층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이들 지배에 저항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에서 일어난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그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 ?∼980년대), 원래의 발해 중심지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요나라의 동경에서 일어난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이룬 부류도 있으니, 이들은 멸망 직전부터 들어왔고 때로는 부흥운동이 좌절될 때마다 피신처를 찾아 망명해왔다. 국내의 태씨, 대씨들은 발해 왕실의 후예로서 그러한 망명자의 후손들이다.

정치제도

(작성 예정)

강역과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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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성

(작성 예정)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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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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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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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연구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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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